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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

작성자 : 수학사랑|조회수 : 2867

이순지(?(?)~ 1465(세조 11)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


조선 시대 세종 때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세종은 과학의 기초로 수학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수학 교과서는 <산학계몽>으로 지금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것으로 어려운 편이었다.
세종은 <양휘산법>을 나라에서 인쇄하게 했는데 세종이 얼마나 수학 애호가였나 하면 세종15년에 경상도의 감사가 <양휘산법> 100권을 인쇄해서 세종대왕께 바쳤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방 관리가 임금에게 바치는 선물이 금은 등의 재물이 아니고 수학책이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세종의 수학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었을 것이다.
세종 때는 천문학도 크게 발전했다. 세종 때 가장 대표적인 천문학자가 이순지였다.
이순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1406년에 태어나 1465년까지 살았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공조와 호조 참의를 지냈고 원주 목사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거친 양반 집안이었다.

 

당시 천문학자나 산학자는 대부분 중인이었으나 이순지는 당대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1427년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에서 근무했다.
그 뒤 세종이 1432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 북쪽에 높이 8m나 되는 '간의대'라는 천문관측대를 세웠다. 간의대는 매일밤 5명의 천문관이 천문을 관찰했는데 이순지는 이 관측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이전부터 천문 역산에 관심이 있었던 이순지는 이때부터 천문학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은 그가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 있을수 없게 되자 믿을 만한 관측자를 놓칠까 봐 근심하기도 했습니다.

이순지는 어머니가 죽자 당시 관습대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나려 했다.

이순지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유별난 것이었다. 5살까지 이순지는 아주 병약했다.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자라지도 못했을 거라고 뒷날 스스로 회고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순지만한 천문 관측자는 없다고 생각할 만큼 그를 철저히 믿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가 관직을 떠난 지 1년만에 그를 억지로 다시 불러들였다.

3년상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있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서울의 위도를 정확히 계산
<세종실록>에 보면 이순지가 서울의 위도를 정확히 계산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1430년대의 어느 날 이순지는 서울의 '북극출지'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했다. 처음에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천문학 책에서 그 값을 확인하면서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이순지는 <칠정산><제가역상집><천문유초> 등 천문학에 관한 책들을 만드는 데 힘썼다. 그 중에서도 <칠정산>의 완성은 큰 업적이었다.
'칠정산'이란 '칠정'의 계산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칠정이란 일곱 개의 움직이는 별 즉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말한다. <칠정산>은 바로 해와 달, 그리고 행성의 운동을 계산하는 기술을 완성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중국의 천문 역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보려고 했다. 그때는 중국의 천문법을 대부분 사용했다.

 

중국의 모든 천문 역법을 정리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한 것이 <칠정산 내편>이었다. 또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의 천문 계산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놓은 것이다. 이순지는 특히 <칠정산 외편>의 완성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칠정산> 내편과 외편 모두에 중요한 몫을 했다.
이렇게 <칠정산>이 완성되어 조선의 천문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표준으로 한 역법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천체 운동의 계산을 정확히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순지는 1445년(세종 27년)에 <제가역상집>이라는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주로 천문, 역법, 의상 구루의 4부에 걸쳐 당시의 지식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의상이란 천문 기구를 말하고 구루란 해시계와 물시계를 말한다.

세종 때 수많은 천문기구와 해시계, 물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런 연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자연 과학의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이순지는 수학에도 전문가였다. 그래서 토지 측량사업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세조 11년(1465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정평군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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