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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제르맹

작성자 : 수학사랑|조회수 : 2913

소피 제르맹


1776년 4월 1일 파리에서 부호의 딸로 탄생하여, 어려서부터 정규교육을 받았으며, 그녀가 13살 되던 해 우연히도 아버지의 서고에서 수학사에 관한 서적을 읽던 중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읽고, 수학이라는 학문의 연구가 한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잊게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감탄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그녀는 수학을 공부하려는 욕망에 불탔지만,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불타는 욕망을 누를 길이 없어서 그녀는 매일 같이, 모든 가족들이 잠든 심야에 일어나 남몰래 수학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도 피곤하여 책상에 엎드려 날이 밝도록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것이 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버지가 그 열성에 감탄하여 수학공부를 허락해 주었다 한다.
그후 그녀는 완전히 독학으로 수학공부를 계속하였으며, 특히 1794년에 파리공과대학(Ecole Polytechnique)이 나폴레옹에 의하여 개교하게 됨으로써, 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가 하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 공과대학에서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르멩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서 제르멩은 궁여지책으로 이 대학의 수학교수인 라그랑제(J. Lagrange, 1736~1813)의 강의록을 손에 넣어가지고 이를 열심히 공부하는 동시에, 이 강의록에다 주석(註釋)을 달고 또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곳에 대하여는 의심점을 지적하여 이 대학의 학생이었던 르 블랑(M. Le Blanc)의 이름을 빌어 직접 라그랑제에게 보내곤 하였다.
라그랑제는 그 주석이나 지적된 내용이 너무도 적절하고 훌륭하였으므로 학생 르 블랑에 대하여 많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는데, 사실을 알고 보니 그것은 르 블랑이 한 일이 아니라, 제르멩이라는 여자가 한 것임을 알고서는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라그랑제는 곧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크게 격려를 하여 주는 동시에 당시의 많은 수학자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25세 되던 해(1801)에는, 독일의 대수학자 가우스(C. F. Gauss)의 '정수론 연구(整數論硏究)'가 발간되었는데, 그녀는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정수론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이 경우에도 르 블랑의 이름을 빌어 가우스와 접촉하였다.
가우스와의 접촉을 통하여 제르멩이 이루어 놓은 가장 큰 업적은 그 유명한 페르마(P. de Fermat, 1601~1665)의 마지막 정리를 n<100인 경우에 모두 해결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우스가 르 블랑의 정체가 제르멩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 후 그야말로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그 당시, 곧 1807년에 나폴레옹의 군대가 가우스의 고향인 브라운슈바이크에 진주하게 되었다.
이 프랑스군의 진주로 말미암아, 아르키메데스의 죽음과 같은 것이 가우스의 신변에도 닥쳐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제르멩은 그녀의 부친의 친구의 진주군의 지휘관에게 서한을 보내어, 가우스의 신변의 안전을 배려해 주도록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르 블랑의 정체가 제르멩임을 알게 되었다 한다.
이 사실을 안 가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곧 '내가 존경하며 서한을 교환하여 온 상대자인 르 블랑씨가, 갑자기 그 유명한 여류수학자 제르멩으로 변신한 데 대한 나의 놀라움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하여 제르멩은 가우스에 의하여 높이 평가되는 동시에 가우스와 학문적 친구로서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1810년 이후에는, 제르멩은 순수수학에서 응용수학쪽으로 연구방향을 바꾸었으며, 특히 탄성론(彈性論)의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816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아카데미상'을 제르멩에게 수여하였으며, 그녀가 죽은 후에는 가우스의 노력에 의하여 괴팅겐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가 수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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