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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Euclid

작성자 : 수학사랑|조회수 : 2561

유클리드(B.C 330~?)


기하학의 창시자이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생존 기록에 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다만 프톨레메우스 1세의 재임시간 초청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고만 전해진다.
전해 내려오는 저서 가운데는 투시도법과 음악이론에 관한 것도 있으나, <기하학 원본> 13권이 가장 유명하다.


수학을 체계화한 <원론>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간혹 자신들이 배우는 수학의 내용들이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수학지식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학문으로서 그 체계를 잡은 최초의 책이 있다면 그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약간은 되지 않을까?
그것은 바로 BC 4세기경 유클리드가 그의 선배격인 피타고라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등이 연구한 여러 가지 자료를 정선하고 거기에 자신의 창작을 가미하여 체계적으로 편찬한 수학 교과서로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학생들에 의해 거듭거듭 학습되어져 오고 있는 <원론, 原論, Elements>이라는 책이다.
이 위대한 수학의 걸작품은 유클리드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그 이전 그리스 수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인데 1482년 에 초판이 인쇄되어 그 이후 지금까지 1천판이 넘도록 인쇄되었으며 2천년 이상 기하학의 교과서로서 군림하고 있다.
<원론>의 내용이 수학이라는 학문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실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속담이 말해주듯이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인들은 기하학의 지식을 토지 측량이나 토목공사 등 국가의 절실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인들은(자유인이나 귀족들)명상하기를 즐기며 현실의 문제를 떠난 관념의 세계에서 '이데아'에 접근하기 위한 이성을 다듬는 도구로서 수학을 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계산술과 같은 기술은 '로기스티케'(logistike)로, 논증적인 수학,

곧 기하학은 '마테마티케'(mathematike)로 구별하여 불렀다고 한다.
물론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그리스인들의 성격도 한 몫 했겠지만 수학을 대하는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총 13권으로 된<원론>을 만들어 냄으로써 건너편에 위치했던 고대 로마인이나 바빌로니아인들이 해내지 못한 수학의 학문적 체계화를 이루어내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한 발 물러서서 보기>
기하학을 배우던 한 제자가 유클리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딱딱한 논리로만 엮어지는 기하학을 배워서 어디에다 써먹겠단 말입니까?
그러자 유클리드는

"그에게 동전 한 닢을 주어라. 그는 자기가 배운 것에서부터 무엇을 얻어야 하니까" 라고 했다.
아마 유클리드는 학문을 통하여 현실의 이익이 생기는 것에 대해 상당히 좋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현실에서 한발짝 떨어져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여유는 그의 이런 태도 덕분일 것이며, 또 이런 태도 덕분에 수학의 학문적 체계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쓴<원론>의 제 1권의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정의를 읽어보면 이러한 점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도형을 관찰할 때, 선, 원, 각, 삼각형 등은 눈에 잘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크기가 없는 점이 있다는데에도 관심을 두었다.
남들이 보지 못한 점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가 경험에 의해서 얻어진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들을 <원론>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록 17,18세기에 걸쳐 유클리드의 수학적 형식이 어느정도 배격되기는 하였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원론>의 체계를 본따지 않는 것은 수학이라고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그의 업적은 수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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